EP. 01 _ WORD TO BODY

2025. 12. 25. 02:50WORD TO BODY

 
 
 

 
몸을 푼다.
2시가 되자 응접실로 사용하고 있던 서점에 대기 중인 관객에게 공연시작을 알린다. 스튜디오 문을 활짝 열리고 관객들이 들어온다. 종일, 밤까지 이어질 긴 공연이 시작된다. 각지에서 오신 손님들은 단차가 없는 넓은 연습실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주 보는 벽에 자리 잡는다. 정면에는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는 자바라가 오픈되어 정돈된 초록 나무들과 벤치들이 보인다. 잔디와 연습실을 오가며 진돗개 강이가 걸어 다닌다. 관객들은 그런 강이를 보며 미소 짓는다. 
 
남부도시의 가을, 보이지 않는 예술인들의 숨소리가 누적된 공간에 새로운 공기로 채워진다.
관객이 모두 앉자, 나는 간단한 인사를 하며 공연의 룰을 설명하기 위해 중앙에 선다.
 
 
 
 

 
 
안녕하세요, 먼 길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공연은 여러분의 작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작은 종이를 드릴 텐데요,
이곳에 '지금 떠오르는', '원하는 단어'를 하나 적어주세요.

 
감사합니다. 

 
 
 
 
 
 
 
설명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들 앞에 작은 종이와 색연필을 둔다. 그들은 원하는 종이와 색연필을 선택한다.
관객들이 단어를 생각하고 쓰는 동안 마지막 관객이 입장하고  테라스와 가장 가까운 스튜디오 경계에 자리를 잡는다. 그녀에게 강이가 먼저 총총 걸어가 옆에 선다. 나는 마지막 손님에게 방법을 설명을 하고 종이와 펜을 내민다.
 
 
모아진 단어를 펼쳐 본다.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을 준비해 둔 하얀 종이에 적는다.
 
 
 
 

 
 

단어가 불러오는 다음을 기다린다
단어가 만들어내는 것을 기다린다
단어로 인해 손이 움직이고 빠르게 선택한다
분석과 검열을 거두고 다음 문장을 이어 적는다
신선함에 나를 가두고 집중한다
 
 
 
 

15분 공연.
작은 부담감이 있었지만 나에게서 대단한 것이 나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다음을 확실히 인지한다.
오늘은 나에게도 새롭다는 것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작은 타인의 단어라는 것.
이것을 잊지 않는다.
 
 
 
펜을 내려놓는다.
입술을 뗀다.
문장을  빠르게 왼다.
나의 작은 목소리
관객에겐 닿지 않는다.
 
몸을 일으킨다. 
문장은 오직 나를 향한다.
입과 몸 멈추지 않고 동작을 부른다.

 
 
 
 
 
 
 
 
 

 
 
 
 
공연 전 문장을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 혼자만, 문장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로 했다.
문장을 읽은  나의 몸이 어떤 발생이 일어나는가에 집중했다.
 


관객의 단어가 모여 
나의 입술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춤은 그 서성거림, 덩어리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글을 본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묻지 않는다
공백으로 존재한다
 

 


춤추면서 강아지 강이를 본다
그녀는 나를 가로질러 걸었다.
강이를 만지는 관객을 보았고, 테라스를 지나던 예술가 동료가 발길을 멈추는 것도 보았다.
나는 때론 누군가를 오래 바라보기도 했다.
그 파동 속에서 우린 함께였다

공연이 끝나고 내가 아일라에게 너의 눈을 봤다고 너도 나를 봤느냐 물었을 때 아일라는 그렇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공연, 그 속에서 교차되는 에너지는 현실과 다르다.
새롭다.
 
 
 
 
언프리페얼드 레지던시라서 가능했던 공연이었다.
두려움 없이 몸과 머리를 던질 수 있었다.
기획단과 관객에게 감사함을 남긴다.  

이 기록도, 다음 기록도, 타인의 단어로부터 시작된다.


2025. 10. BUSAN
 
 
 
 
 사진 @jau__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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