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6. 14:36ㆍ연극

대본 없는 연극은 가능할까.
2023 거리예술창작센터_거리예술가전문가과정_[제3의 공간]의 마지막 일정은 자신의 창작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발표 장소가 북창동으로 정해졌다. 머리를 텅 비웠다. 작가들에게 각자의 거점을 찾아오라는 시간을 부여받았을 때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걸었다. 가끔 그런 무념무상에서 오는 확신이 있다. 그리고 걷다가 느꼈다. 바로 저곳이라는 생각. 그해 가을을 닮은 서사를 만들고 싶었다. 왠지 모를 이야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불안하지 않았다.

남대문로 1길 9-1과 11 사이
옛 조선시대에 우물터였던, 현재 스타벅스와 연결되어 있는 이곳은 보는 위치에 따라 입구와 출구가 불분명한데 두 개의 출구이자 입구가 된다.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이자, 휴게공간이자, 건물과 건물을 잇는 방향이 다른 지름길이기도 하다. 서울 한가운데에 위치한 보기 드문 조용한 휴게 공간으로 입구가 출구가 되는 이 두 개의 문 없는 통로는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이러한 신기한 구조가 가능한 것은 복잡한 북창동의 역사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북창동은 현재도 일본가옥부터 문화유산지정 건물, 그리고 현대식의 대형건물까지 다양한 형태의 건물이 공존해 있다. 점심시간에는 술집도 밥집으로 변하는 회사원 밀집지역이지만 서울에서 이렇게 큰 간판이 있나 싶은 만큼의 유흥업소의 대형간판도 볼 수 있다. 눈대중으로 보기엔 대형 피크닉 돗자리만 하다. 아마 더 클 수도 있겠다.(하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좁은 골목골목 사이로 30년 이상의 백반집, 세탁소집, 열쇠집, 도장집 등이 실타래처럼 모여있기도 하고 군데군데 있기도 하다. 더불어 대형 소니매장과 골목마다 자리 잡은 여러 개의 스타벅스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서울의 건물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돌아가서 남대문 1길과 9-1과 11 사이는 소개를 이어하자면, 이곳은(연극공연장소) 한 곳에서 30년을 이상 음식점을 하신 두 사장님들의 가게 사이에 위치해 있다. '연탄불 돼지고기'와 ' 가락국수가게(송옥)'가 그러하다.


이 두 가게 사이를 (남대문로 1길 9-1과 11 사이) 들어가면 왼편에 정갈하게 세워진 우물터의 역사를 설명해 둔 표지판이 있다. 오른편에는 길고양들이 뛰어 놓을 수 있는 작은 화단이 있다. 그곳에는 길 고양들을 위해 준비한 누군가가 둔 그릇도 보인다. 벤치와 자전거 보관대를 지나면 걸터앉기가 가능한 정리된 화단이 쭈욱 이어지고 건물을 끼고 오른편으로 돌면 그때부터는 바닥이 목재로 깔린 데크를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 스타벅스가(숭례문북창지점) 있다.

역시나 금연구역이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 얼마나 한적한지 이 스타벅스를 다녀온 블로거에게도 한적한 스타벅스로 추천되어 있다.(나도 가끔 생각 남) 아무튼 나는 시간이 없었다. 2주 정도. 2주 안에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 내야 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구성원들 중에 연기를 하고 싶은 사람을 선발했다. 공연 장소와 간략한 연출방법과 구도를 설명했고 이것에 공감하는 두 사람이 나와 함께 하기로 했다. 재연은 배우였고 오랜만에 연기를 하는 것이라 망설여진다고 했다. 자림은 연기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재연과 자림과 함께 2주를 남겨두고 연극을 만들기 시작한다.


재연과 자림은 또한 그들의 작품을 선보여야 하는 작가이기도 해서 연극연습을 많이 할 수 없었다. 나는 일단 연습 날짜 세 번을 잡고 첫 미팅 전까지 가능한 많은 글을 쓰기로 했다. 기획의도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 연극을 왜 해야 하는지 뚜렷이 알고 시작해야 중간에 허비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생각했다. 다시 한번 북창동이 어떤 곳인지를 살폈다. 역사 자료를 기반으로 현재의 북창동 남대문로 1길 9-1과 11 사이라는 장소에서 연극해야 하는 명분을 찾았다. 북창동이 존재하는 사실, 우물터와 휴게공간 그 사이의 시간, 장소의 분위기, 두 사람이(캐릭터가) 현재 북창동에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으며 캐릭터를 형성했다.
캐릭터가 그 공간을 점유해야 하는 이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감독님은 작가들에게 거리예술 특성상 20분을 넘지 않기를 요구하셨고 나는 15분으로 정했다. 거리예술은 극장보다 집중력을 가지고 보기에 주변환경의 자극이 많아 쉽게 눈을 돌릴 수 있다. 어떠한 장르보다 배우와 관객의 체력적, 정신적 소모가 크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의 동선과 관객의 자리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관객의 동선을 차단하면서 집중할 수 있는 요건을 연출하는 것에 집중했다. 북창동에, 옛 우물터이지만 현재는 휴게 공간으로 바꿔진 이곳에서 존재에 이유가 합당하다고 느껴지는 캐릭터의 구상을 끝낸 후 인물 관계를 구축했다. 두 여자는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왜 이곳에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지, 15분이라는 시간 동안 관객이 몰입을 하기 위해선 어떤 스토리 어야야 하는지를.


사실 장소를 이곳으로 선점한 이후에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이야기, 공연장으로 선보일 휴게 공간 근처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가 브레이크 타임시간 잠시 쉬는 시간에 일어나는 해프닝, 잠깐의 휴식을 빼앗아가는 인물, 그 인물로 인해 망쳐버린 나의 젊음, 인내, 고난, 현재도 미래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다 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북창동의 고유성과 현재 그리고 인물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맥락을 찾고 싶었다. 내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것이 북창동 길거리에서의 어떤 곳에서라면?
나는 일하는 젊은이를 떠올렸다.
시간 없음+처음 만난 사람들+거리에서 첫 연극 시도+대본 없이 연극하기+연습시간촉박
어느 하나 쉬운 조건은 없었지만 하나의 마음으로 동결시킨다.
'이건 실험이다'
실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 투성이었다. 가능함 속에서 두려움은 필요 없었다.



▷배우, 담화
1. [캐스팅단계]에서 이런 대화를 했었다
루나. (통화 중) 자림한테 연기할래? (자림이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었던 걸 기억하고 전화했었다)
자림. 음..... 못해도 돼?
루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못해 돼.
루나. 연기해 본 적 있어?
자림. 없어.
루나. 근데 왜 한다고 말하는 거야?ㅋㅋㅋㅋ
자림. 해보고 싶어서
나는 시간이 지나도 이 대화가 계속 생각난다. 이질적인 면서도 실소가 나오는 이 문장들이 온전하게 기억에 남는 건 이 대화가 너무 사랑스러워서였다. 실로 그렇다.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자림의 그 당당함과 하지만 못 해도 되냐라는 말이 중첩되면서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이 실험을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새로운 챕터를 열기를 원하고 있었다.
2. [연습 중]
루나. 근데 자림은 연기도 처음이고 두렵지 않았어?
자림. 겁났지. 괜히 한다고 하는 거 아닌가 해서. 내 거 하기도 바쁜데. 근데..
루나. 근데?
자림. 못해도 된다고 해서 한 거야. 나는 불안한데 루나는 안 그래 보이더라. 뭔가 대평 해 보였어.
루나. 나는 네가 안 불안했어. 너는 불안해 보였는데 나는 네가 안 불안했어.
참고로 첫 연기 도전이었던 자림의 연기는 모두의 칭찬 일색이었다. 예술감독님은 자림이 원래 배우였던가요? 네? 처음이라고요? 그냥 계속 연기 해도 될 것 같은데요 라고 말씀하셨다는 후문
3. 재연은 섬세한 사람이다. 각자 이름을 걸고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나의 작품까지 출연하면서 고생을 참 많이 했다. 공예작품을 준비해야 했던 재연은 거리예술창작센터를 오가면서 연습에 참여해 주었는데 촉박함 속에서도 나의 작품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항상 대본에 대해 질문을 많이 던져 주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장문의 톡으로 질문하면서까지 캐릭터에 닿기 위해 애써주었다. 나는 그런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탄탄한, 근거가 잡힌 캐릭터에 대한 보충설명을 준비해서 연습실에 참여했다. 재연 덕분에 세세하게 체크하며 밀도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재연의 깊은 마음에 참으로 감사하다.
4. 재연에게 필요한 소품은 구두였다. 재연과 발사이즈가 달랐던 우리는 빌려 줄 수 없어서 재연의 구두를 구입하기 위해 마지막 연습날 시간을 쪼개서 나와 재연은 작업실 근처 동대문 쇼핑몰로 향해 나섰다. 재연과 걸으며 이런저런 연습에서 나눌 수 없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연: 루나가 배우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소통, 조율하는 게 너무 좋아. 그런데 배우로서 연출, 루나의 이야기도 들려주면 좋겠어.
루나: 응 맞아..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재현하지 않으려고 그동안 노력했어... 내가 겪은 연출들은 나를 힘들게 했고 배우로서 아니 인간으로 어떤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못했거든. 젠틀하지 못했어. 그런 걸 조심하려고 하다 보니까 재연이 말한 그런 부분이 생기나 봐.... 나도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고마워 말해줘서!
재연: 아니, 오해하진 마! 싫다는 게 아니야! 다만 배우의 이야기만 듣다 보면 루나가 지칠 수 있어. 그리고 배우로서 연출이 원하는 어떤 지점에 빨리 도달해주고 싶은 그런 욕구가 있다 말이야. 근데 그게 정확히 닿지 않으니까 뭔가 계속.....
루나: 응 알 것 같아 그 마음. 사실 나는 그동안 앞선 작업들에서는 깨닫지 못했거든. 그러니까 뭔가 협업에 대해서, 뭔가 내가 경험한 그 상처뿐이었던 연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에 초점이 강하게 맞춰져 있었어. 근데 그것 말고 이젠 다른 하나를 넘어야 한다는 걸 알아... 진짜 말해줘서 고마워 이젠 새로운 고민을 할 땐가 봐.. 이제 깨달았으니까 나도 노력해 볼게! 어떻게 배우에게 도달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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